시트구루와 GPT에게 속았노라

시트구루 안내도

항공권을 예매하면서 가장 큰 고민은 창문/복도  중 어디를 택하느냐였다. 창 밖의 풍경도 놓치고 싶지 않고, 17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이니 편의도 고려해야하니 이래저래 고민이 길어졌다.
내가 탈 비행기는 에티하드 항공의 보잉 787-9. 시트구루  정보가 있긴 했지만, 한참 전에 업데이트 된 정보라 완전히 믿기는 어려웠다. 이에 시트구루 정보와 보잉787-9의 전면 사진 등등등과 함께 GPT와 함께 치열한 토론을 했고, 날개를 피해 바깥을 가장 잘 볼 수 있다는 23열로 추가요금까지 지불하며 자리를 선점했다.
그리고 23K에 앉은 내가 본 것이 바로...

 

23열은 날개 피한다며?

정확히 날개'만' 보이는 창문이었다.

(참고합시다... 에티하드항공 보잉787-9의 23열의 뷰는 저렇습니다)
GPT 이 깡통자식이 진짜.. 날개를 피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냥 날개 위 자리잖아 이거. 두고보자 이번 달만 끝나면 바로 해지해버릴 것이다.

비행 중 짧은 이야기

치킨 치킨

이내 기내식이 제공되기 시작했다. 메뉴는 늘 그렇듯 '치킨, 비프 그리고 비건'.

하지만 상대적으로 뒷쪽이었던 탓일까, 소고기는 이미 다 팔린 상태라 닭고기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치킨을 주문하고 나서, 옆 자리에 앉은 부부 두 분이 주문을 어려워하시는 것 같아 오지랖을 떨며 도와드렸다.

두 분은 열흘짜리 크루즈를 타러 가신다고 한다. 멋있는 부부셨다.

대화를 하다보니 인상이 좋다고 조카를 소개시켜주고 싶다고 하신다. 역시 내가 좀 어르신 픽이긴 하지.
소개팅은 웃어 넘기고 한국 돌아가면 식사나 한 번 같이 하자고 말씀 드렸다.

+요새 비행기는 기내에서 와이파이가 된다. 에티하드 항공만 그런가?
에티하드 항공 회원이면 채팅만 가능한 요금제(4.99달러)는 무료로 이용 가능하다.

아부다비 공항

Transfers :)

 

스윗한 아부다비 공항 스타벅스
그런데 이제 동양인 이름을 못알아듣는

도착 예정시간보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한 아부다비 공항. 다음 비행기까지 4시간이나 남아버렸다.
아부다비 시간으로 22시, 한국시간으론 새벽 3시이기에 따로 식사를 하기도 애매한 상황. 스타벅스에 앉아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시간이 생긴 김에 에티하드 항공 상담사와 연결하여 자리를 23에서 16으로 옮겼다.

집에 갈 때는 날개뷰 아니다 GPT 이자식아.

 

아부다비 투 마드리드

같은 23K, 같은 날개뷰

우여곡절 끝에 마드리드로 향하는 환승편에 탑승했다. 자리는 똑같이 23K(날개뷰).

한국시간으로 따지면 밤을 샌 것과 같아 출발 후 30분 쯤 주는 가벼운 스낵(칩 또는 오레오)을 받고 바로 기절했다.

잠시 기절했다 일어나니 시간은 어느새 마드리드 착륙 약 1시간 전.

원래 예정시간이던 08:30보다 50분 정도 빠른 07:45에 도착 예정인 것을 보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다

문제의 Renfe 티켓

마드리드에서 프랑스길의 시작인 생 장 피에르포드로 가기 위해선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1) 마드리드에서 생 장 피에르포드로 야간버스로 이동하기

2) 마드리드에서 팜플로나로 기차 또는 버스로 이동한 뒤, 팜플로나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생 장 피에르포드로 이동

2_1) [팜플로나 TO 생 장] 버스는 하루 1번 있음(하절기 오후 12시)

 

나는 이 중 2번, 마드리드~팜플로나~생 장을 총 이틀에 걸쳐 이동하기로 하였다.

미리 알아본 결과, 내 스케쥴에 맞는 팜플로나행 렌페(기차)는 10:30, 14:00 2개.

하지만 마드리드 도착 시간이 08:30이라 입국 심사, 마드리드 시내까지 이동 등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할 경우 10:30 기차는 너무 빠듯할 것 같았고, 그렇다고 오후 2시 기차를 타자니 딱히 3시간 동안 마드리드 시내에서 할 것도 없을 것 같아, 결국 공항에서 12시에 출발하는 고속 버스를 타고 18시에 팜플로나에 떨어지기로 한국에서 계획했었다.

 

그런데 비행기가 예상보다 빨리 도착한 덕분에 잘하면 10:32 마드리드 아토차 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탈 수도 있을 것 같아진 것. 10:30 기차를 탈 경우 팜플로나 13:50 도착으로 무려 4시간이나 일찍 도착하게 되니 비용은 비싸지만 시간 상 훨씬 이득인 상황. 만약 기차를 놓치더라도 14시 기차가 있으니 해볼만한 것 같아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차를 타는데 성공은 했다. 하지만 과정은 정말이지 험난했다.

 

공항에서 마드리드 아토차 역까지, 치열한 타임라인


08:06 비행기 탈출

할만하겠는데 생각이 들어 과감하게 12시 버스표는 취소하고 10:32 기차표를 예매했다.

생각보다 긴 입국 심사 줄에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나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08:56 입국 심사 통과

08:57 T4s 터미널에서 T4 터미널로 이동하는 셔틀 탑승했다.
09:01 운 좋게 T4 터미널에서 배낭을 한 번에 찾았다.
09:02 시내로 가는 렌페 티켓 발권기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 미친 티켓 머신, 도저히 티켓을 뽑는 방법을 모르겠다.

Other Language에서 영어로 바꿔봐도 내용은 여전히 스페인어라 알아볼 수가 없고, 구글 번역기도 먹통이다.

옆에 직원에게 물어봤지만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젓더니는 다른 곳으로 사라진다.

16분 기차를 타야하는데,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09:15 감으로 때려맞춰 간신히 아토차행 티켓 발권 성공.

16분에 출발하는 C1 열차 탑승을 위해 달려 내려간다.

 

가지마라~ 가지마라

09:17 내려가는 계단에서 출발하는 C1 열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절망한다.
09:40 다음 열차에 초조하게 탑승한다.

이 열차를 타면 아토차역에 10:20에는 도착한다는 구글맵의 말을 믿어본다.
09:57 환승역에 도착한다.

여기서 09:59에 출발하는 다른 노선으로 환승해야한다.

구글맵은 10번 플랫폼에서 탈 수 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7번 플랫폼에 열차가 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달려가 탑승한다.
10:05 59분에 출발한다던 열차는 아직도 출발하지 않았다.

이게 시내를 가긴 하는건가, 내가 잘못 탔나, 10번 플랫폼으로 가야되나?그 때,

아무런 고지도 없이 스무스하게 출발한다. 이미 6분 지연이다.
10:20 아토차 역 도착 직전, 열차가 선로에 멈춰섰다.

더욱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순례길에 왔는데 내가 너무 큰 욕심을 부렸나? 내가 왜 모험을 걸었을까. 온갖 생각이 다시 떠오른다.

10:24 마침내 아토차 역에 하차.

제일 먼저 내려 인포메이션 조끼 입고 있는 아저씨들이 보일때마다 ''팜플로나?!!"하고 외친다.

친절한 아저씨들이 손으로 방향을 알려준다.
10:26 열차 플랫폼에 도착했다.

비행기마냥 짐을 내리고 X-ray 보안검사를 통과해야한다.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10:29 간신히 열차에 올라탔다.
10:32 놀랍게도 제 시간에 출발하는 팜플로나행 기차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

우당탕탕 기차에 올라타고 나니, 땀은 이미 비오듯 쏟아지고 있어 한참 동안 가쁜 숨을 내쉬었다.

생각을 정리한다는 순례길의 시작부터 내가 너무 큰 욕심을 부렸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웰컴 투 팜플로나

가뜩이나 머리가 어지러운데, 같은 칸의 미국인이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탓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간신히 눈을 감고 나니 어느새 종점인 팜플로나에 도착해 있었다.

 

팜플로나 기차역

팜플로나 기차역에서 20분 정도를 걸어 한국에서 미리 예약한 알베르게로 향했다.

배낭은 생각보다 묵직했다. 내가 이걸 들고 30일을 걸어야한다고? 갑자기 아찔해졌다.

나 혼자만 시내로 향하는게 어쩐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 맘과 달리 맑았던 날씨

구글맵의 안내를 따라 구비구비 걸어가니, 저 멀리 내가 예약한 Casa Ibarrola 알베르게 간판이 보였다.

 

첫 알베르게

긴장한 얼굴로 알베르게에 들어서자, 스태프가 밝은 얼굴로 Hola! 하고 나를 반겨줬다.

 

"부츠는 여기 입구 신발장에 벗어두면 돼! 신발을 갈아신고 안으로 들어와! "

 

주섬주섬 가방에서 샌들을 꺼내 신고 알베르게로 들어갔다. 스태프는 명단에서 내 이름을 확인하고 나선 순례자 여권~크레덴시알~을 보여달라고 했다. 내가 놀라서 손사레를 치며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고 하자 그럼 다음 번에 찍어줄게! 하며 웃어 넘겼다.

* 사실 알베르게는 순례자를 위한 특수한 숙박 업체(?)이기 때문에, 순례자 여권이 있어야만 묵을 수 있다.

순례길이 끝난 지금 생각해보니 사립 알베르게라 가능한 일 같았다.

 

배낭을 던져놓고 집에 잘 도착했다고 전화를 드린 뒤 팜플로나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러 나섰다.

 

순례길 첫 끼니

입맛이 없어 광장 근처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손에 들고 휘적휘적 돌아다녔다.

햇살은 뜨거웠고, 나 혼자 이곳에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점점 멘탈이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첫 날부터 이러면 안되는데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어 악순환이 계속 됐다.

근처 까르푸에서 오렌지 착즙 기계를 발견해 간신히 한 병 사들고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캡슐호텔 같은 곳이었다

아침부터 뛰어다녀서일까, 시차 적응의 문제일까.

가벼운 감기몸살 증세가 겹쳐 오후 6시쯤 끼무룩하고 잠들어버렸다. 아쉽지만 첫날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잘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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