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만 같았던 이집트 여행을 다녀온지도 벌써 5개월이나 지났다.

이번만큼은 기록해야지, 남겨놔야지 다짐했지만 어영부영 달이 바뀌고 해가 지나갔다.

전부 아련한 전생의 기억처럼 사라지기 전에, 첫날부터 천천히 기록을 시작한다.

[J를 꼬셔서(강요해서) 같이 기록한다]

 

 

#0. 사건의 발단

 

내 버킷리스트의 1번은 언제나 이집트에 가보는 것이었다. 어릴 때 읽었던 크리스티앙 자크의 람세스가 원인이었다.

뜨거운 사막, 파라오의 유물과 웅장한 피라미드, 신전, 도도하게 흐르는 나일강!

W(11) 어린이는 그렇게 이집트 뽕에 취해버렸고, 언젠간 가리라 마음을 먹었더랬다.

 

차일피일 늙어가던 직장인 W(31)는 10월에 황금연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직장인에게만 보이는 10박 11일

똑같은 5일을 내도 8박 9일이 10박 11일로 업그레이드되는 기적의 황금연휴. 놓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여행 난이도 최하의 일본만 가봤지 아시아 너머로는 가본 적이 없는 쫄보.

같이 갈 사람으로 군대 동기 J를 꼬시기로 한다.

 

이집트는 어떤 곳이며, 왜 가야하는지 J를 설득했던 장장 66분의 통화

"야 여행 갈래?"

"어디"

"이집트"

"태어나서 여행을 갈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곳이군"

 

생각은 해본다며 전화를 마친 J는 월요일 아침, 카톡을 보냈다

"야 이집트 10개월 할부라고??"

그리고 2시간 뒤, 우리는 이집트행 왕복 항공권을 결제했다.

 

[J]

항공권 결제하고 이집트 가기까지 10개월 정도 시간이 있었는데
그동안 지인들과 이런 대화를 10번쯤은 한 것 같다.

나 : 저 10월에 여행가요
지인 : 오 좋겠다! 어디로?
나 : 이집트요
지인 : (...) 왜?

10개월 동안의 여행준비는 그 왜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랄까
하튼 카톡대로 무이자 할부가 아니었다면 여행 안 갈 수도 있었다
무이자 할부 지원해주신 현대카드께 감사의 인사드림

 

그리하여 예약한 비행 스케쥴

 

 

#1_1. 여행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집에서 아버지 몰래 들고온 여행 배낭과 밀짚모자 "낭만"

[J]
우리는 저 밀짚모자("낭만")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13시 비행기니 넉넉하게 09시 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아뿔싸 공항 리무진 버스에 자리가 없다.

집 앞 정류장이 인천공항으로 가기 전 마지막 정류장이라 그런지 타기도 전에 다 차 버린 것.

 

지금이라도 지하철로 뛸까, 쏘카라도 빌려야 되나 고민하던 중에 버스에서 내린 분이 말을 건다. 

"혹시 인천공항 가시나요?"

"괜찮으시면 저랑 같이 택시 타고 가시죠. 리무진 버스비만 주시면 나머지 차액은 제가 부담할게요"

얘기를 들어보니, 이분은 바로 앞 정류장에서 타려고 했다 까이셨고(?) 다음 정류장까지만 태워달라 부탁해서 타고 오셨던 것. 다음 버스가 온다고 해서 자리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 당연히 내 대답은 YES다.

 

사실 이 때 여권을 챙겼는지 안챙겼는지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함. 

태풍으로 항공기 결항이다 뭐다 말이 많았는데 출발일이 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맑아진 하늘.

뜻하지 않은 택시 덕에 예상보다 일찍 도착해서 J를 기다린다.

 

13:00 SU251편

우리는 돌아오는 날 반나절 정도 짬을 내어 모스크바 관광도 할 수 있는 일정이라 아에로플로트(모스크바 경유)를 선택했다. 물론 이게 다른 항공권과 비교했을 때 저렴하기도 했다.

 

최후의 만찬. 한국인의 빅-불버거

조금 뒤 도착한 J를 만나 짐을 붙이고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마지막 식사(?)니만큼 한식을 먹으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그냥 롯데리아로.

 

때마침 볼 수 있었던 공항수문장교대식

 

아직 출발 전이라 둘 다 표정이 좋다

 

다들 어디로 가는걸까

 

여행 가면 다들 찍잖아요

 

우리가 타는 비행기 같지만 사실 아니다

 

우리가 탈 아에로플로트. 마더-로씨아 국적기

 

출발합니다

 

#1_2. 우리는 모스크바로 갑니다

 

비행기 내부

 

먼길 간다고 뭘 많이 챙겨준다

 

인천부터 모스크바까지 9시간 30분의 비행. 조금 늦었는지 J와 나는 붙어있는 자리는 받지 못했다.

이 와중에 내 자리는 왼쪽에는 쏘련 누나, 오른쪽에는 쏘련 아재의 가운데 자리. 

처음 본 외국인과 인사를 나눌 만큼의 인싸력은 없으니 조용히 영화나 보며 가기로 한다.

 

정말 정말 정말 좋았던 날씨

 

내가 지금 갑니다

 

인천을 막 출발하고 난 뒤

 

서빙 된 지굴리 맥주. 술도 못하면서 괜히 마셔본다

쏘련 누나도, 쏘련 아재도 맥주를 마시길래 나도 질 수 없다며 마셔본 지굴리 맥주

(심지어 오른쪽 아재는 식전에 4캔을 마셨다)

맥주 마시고 빨리 기내식 먹고 기절하는 게 목표다.

이게 유명한 맥주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용기가 없어 혼자 고개를 주억거린다. 이거 맛있네.

 

여담. 이 맥주 한 캔 때문에 모스크바 내려서 숙취로 고생함.

 

그 사이 비행기는 중국 위를 날아가고 있다. Duolun이 어디야

 

기내식 리스트

앉자마자 확인한 기내식 리스트

이렇게 메뉴판을 보니 괜스레 설렌다.

 

으깬 감자와 라따뚜이를 곁들인 토마토 소스 대구. a.k.a. fish

 

굴소스를 곁들인 에그누들과 생강소스를 곁들인 볶은 닭고기. a.k.a. chicken

(기내에서 쓴 일기)

잠깐 선잠이 들었다가 깼다. 기내용으로 제공된 안대를 꼈는데, 역시 자는 데는 안대만 한 게 없다. 나중에 챙겨야지.
옆자리 아재가 보다가 잠이 든 인피니티워를 멍하니 본다. 마침 또 타이탄 행성에서 싸우는 씬이라 눈이 쉽게 떨어지질 않는다. 아! 아재가 잠에서 깨서 잠든 부분까지 돌려버렸다. 내리기 전까진 나오겠지.
여행 계획이라도 짤까 싶어 일어나기로 한다. 이렇게 무계획으로 가도 괜찮은 것인가 하는 걱정도 든다.
지금쯤이면 야구는 한창 초반 3,4이닝쯤이겠지. 하느님알라님김택진님 엔씨가 이기게 해 주세요.

 

왠지 거의 다 온 것 같다

 

내려간다ㅏㅏㅏ

비행기가 내려가는 게 느껴진다.

기장일까? 멋진 제복을 입은 러시아 승무원이 돌아다닌다.

소매에 낫과 망치 마크가 박혀있다. 역시 러시아야!

 

이렇게 덩그러니 내려줘버림

덩그러니 활주로에 내려버렸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가라는데, 잠도 덜 깨고 아까 마신 맥주 탓인가 정신이 금방 돌아오지 않는다.

 

여행 오기 잘했다고 느꼈던 첫번쨰 지점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아 나 지금 여행 왔구나.

 

뜻하지 않게 너무 멋있는 광경을 본 나. 싱글벙글

아무튼 도착한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들어갔다.

 

오 쉣

여행 전에 모스크바에서 환승을 가장 걱정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입국장부터 헬이다.

이 많은 인파를 뚫고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물론 가는 길은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 쉽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공항 와이파이를 잡고 야구 결과를 찾아봤다.

1-3 패배. 응 수고요

여행 내내 야구 볼 걱정은 없겠구나 :) 망할

 

[J]
러시아에 도착했을 때 두 가지를 기억해야 했다.
1. 러시아는 춥다
2. 러시아 입국 심사는 만만치 않다

하지만 너는 러시아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지..
처음엔 그냥 보내줬지만 다음 모스크바는 쉽지 않을 것이야

+ Recent posts